네팔

[스크랩] 신비스러운 네팔 쿠마리와의 만남

뜰안에 달빛 2013. 11. 29. 14:56

 

 

네팔 수도 카트만두 분지에는 오래 전에 호수물이 고여 있었는데 그 호수물이 흐르면서 고여 있었던 골짜기를 네팔 계곡이라고 하였다.

현재 네팔이라는 나라 이름은 네팔 계곡에서 유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히말라야산맥 남쪽 산비탈에 위치하면서 동쪽과 서쪽으로는 대략 850km이고 남쪽과 북쪽으로는 250km의 동서로 긴 국토를 이루고 있는 국가였다.

북쪽으로는 중국의 서장 자치구(티베트)와 접하고 있었고, ··남쪽은 인도에 둘러싸여 있는 평야지대와 산맥 사이의 계곡형태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라는 것을 지도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대한 항공 695 비행기에서 내려

네팔 땅을 밟으며

 

 

네팔 입국 심사를 하고 있는 모습

지치고 짜증스런 가운데 2시간 동안 서있는 가운데

여행의 즐거음은 사라지고 

 

 

주중충한 국제 네팔공항의 모습

인천 국제 공항은 세게적 공항리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네팔에 있는 몇 개의 강은 고산 지역인 티베트에서 흘러오지만 대부분은 히말라야 산맥에서 발원하는 강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강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은 대부분 인도로 유입되어서 힌두교 인들이 신성시하는 갠지스 강에서 합류되었으며 히말라야산맥이 있는 지역은 티베트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에베레스트 산을 비롯하여 칸첸중가 · 마나슬루 · 안나푸르나 · 다울라기리 등 8,000m급의 고봉이 줄을 이어 네팔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네팔의 고대사는 전설과 사실과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는 부문이 있기는 하나 인도 고대문화와 티베트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었고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원형 그대로의 자연 경관과 빼어난 설산을 중심으로 구전된 문화가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B·C 3세기 경 인도 소승불교를 중흥시킨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이 네팔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전설처럼 이야기가 내려온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고대 문화가 상존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B·C 5세기 경 고다마 싯다르타가 네팔의 타라이 지방 룸비니에서 태어났고, 성장지는 카빌라성에였다.

하지만 불교 포교활동은 네팔의 동남부와 인도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가다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네팔은 7세기 초에 티베트의 속국이었으나 9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이슬람교도의 침략에 쫓긴 라지푸트족이 인도로부터 이주하여 옴으로써 인도적인 문화 요소가 섞이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지배민족인 구르카족은 라지푸트족과 선주민인 네와르 족과의 혼혈로 이루어진 민족이다.

  

원숭이 공원인 스와얌부나트에서

내려다본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전경, 자연은

아름다울 뿐 아무 말이 없다.   

1769년에 구르카 왕조의 프리트비 나라얀 왕이 네와르족 중심의 왕국을 정복하여 오늘날로 이어지는 왕조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후에 티베트로 진출하여 정복을 꾀하려다가 중국 청나라 군대에 패하고 다시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인도 침입을 추진하려다가 1814년에 영국과 충돌한 네팔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 후 영국의 지배를 받은 네팔은 영국 사절의 카트만두 주재를 인정하면서 혼란과 분열로 점철되어 나라가 한 때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스와얌부나트 사원에서 학생들은 그림을 그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해 있다.  

1846년에 라나 일족의 장군 장 바하두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그때부터 라나 일족의 세습 재상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었다.

장 바하두르는 영국과의 협정에 따라 제휴하는 것이 네팔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인도의 세포이의 항쟁 때 인도 진압군으로 네팔 고산지대에 살고 있는 다수의 전투민족인 구르카병(용병)을 파견하였다.

영국과의 협력체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3년 영국과의 사이에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어 완전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탑

신의 장난일 지도 모르겠다.

수도 카트만두가 자리하는 카트만두 분지는 평균 해발고도가 1,350m이며 고지 주위로 20km 정도의 큰 분지를 이루고 있어 네팔의 심장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같았다.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고다마 싯다르타의 출생지인 타라이 지역은 힌두스텐 평원의 북단부를 이루는 남부 산록지대로, 너비 20km 정도의 평지가 산록을 따라 띠 모양으로 펼쳐지는데, 근래 농경지 개발이 진척되어 네팔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고온다습한 아열대기후를 이루고 있으나 겨울에는 쾌적하고 서늘하여 비교적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지닌 지역이다.

  

   제 3의 눈이 인간들을

지켜보고 있다.

네팔은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인도 아리안 족의 카스트 문화와 힌두문화 그리고 티베트의 불교문화, 중국의 유교문화 등 여러 문화가 혼합된 다민족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었다.

네팔 문화의 큰 특징은 힌두교와 불교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불교사원 내에 힌두사원이 그리고 힌두사원 내에 불교사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종교 행사나 장례 의식 및 국가 행사 때도 힌두교도와 불교도가 함께 참여하여 종교적인 갈등이나 불안 요소를 정부가 사전에 제거하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안개인지 매연인지 구분하기 모호하고

하늘 아래 카트만두는 시름에 잠겨있다.

한국과의 외교 관계는 1974515일에 한국과 수교하였고 동시에 북한과도 수교하여 남·북한 간에 다 같이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있었다.

19715월에 한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1988년 문화협정, 항공협정을 체결하였으나 비동맹 원칙에 따라 남북한 간의 등거리 정책을 펴고 있었고 1988UN(국제연합) 총회 시 한국의 UN 가입 지지 발언을 하였던 선례가 있었던 국가이기도 하였다.

 

나는 평소에 에베레스트 산의 신비로움에 동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들만이 존재하는 비경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 8,848m 정상은 오르지 못할 지라도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베이스캠프까지 만이라도 트래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해오다가 네팔과 인도여행을 추진한 정 정남 사장님의 배려로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트래킹은 아닐지라도 평생 가볼 수 있는 기회가 더 있을 것 같지 않아 선뜻 동의를 하고 여행 상품 내용을 확인하여보니 불교 창시자 고다마 싯다르타의 탄생지인 룸비니와 힌두교 성지인 바라나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불교의 성지를 관찰하여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가슴에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매캐한 안개와 매연과 먼지와의 조합

뭐 그렇거니 생각하면 행복할텐데

답답하기만 하고...  

이번 여행은 부부가 동행하여 가는 여행인지라 모든 것을 세심하게 조사하였다.

자연 환경과 기후, 음식 문화 등의 차이를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으며 여행사 측의 사전 주문이 기후로 인한 일교차와 음식을 적응하는 문제가 어려울 것 같으니 사전에 준비하여야할 옷가지와 라면과 밑반찬이 필수적일 것이라는 말에 여행 가방이 두툼해져 여간 힘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인천 공항 미팅시간이 2013. 10. 25() 오전 06:00시라는 말을 듣고 나를 더욱 긴장시켰으며 오전 04:00에는 기상하여야 여행 준비를 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마음이 무거웠으며 과연 그 시간에 기상할 수 있을 런지도 알 수 없어 불확실성이 점증하고 있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전경  

 

1025() 기상시간을 새벽 3시로 알람을 맞추어 놓고 24() 오후 10시에 취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아 비몽사몽 중에 밤 12시에 눈이 다시 떠지면서 새벽 4시까지 몸을 뒤적이다가 오전 425분에 양재역에 있는 인천공항 행 공항버스 승차장에 도착하여 버스에 승차할 수 있었다.

인천 공항까지는 1시간 거리였지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약간 빠른 시간인 새벽 05:25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르바르 광장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꿈을 이루려고...

  

공항에 도착한 나는 미팅장소를 확인하기 위하여 자유 투어 여행사 데스크로 걸어갔으나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여행사 측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여행사 직원이 아직 출근하지 않아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직원이 출근한 것을 확인하고 서류를 인계받아 항공권과 교환한 다음 08: 40분 네팔 카트만두 행 대한항공 695기에 탑승하였다.

집사람이 고공 공포증이 심각한 상태인지라 비행기 탑승이 걱정이 되었으며 짜증 섞인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는 괜한 짓을 하지 않았나하는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사원의 건축 기술은 감탄을 자아내고

아름다음에 취해 걸어보고

행복을 나눈다.

 

네팔 공항에 도착한 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과 자연경관의 아름다음에 탄성을 지르면서도 두 시간 이상 지체된 입국심사가 나를 지치게 하였고 입국장의 우중층한 분위기가 더욱 짜증스럽게 하였다.

그러나 입국 수속을 마친 후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맑았으나 후덥지근한 날씨임에도 여행객 각자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가이드의 본분을 다하려는 듯 웃는 네팔인 가이드 하리의 해맑은 얼굴과 자상하고 친절한 설명에 혼을 잃고 말았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9인승 승합차를 타고 원숭이 공원인 스와얌부나트를 관람하기 위하여 네팔 수도 카트만두 시를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시내의 무질서한 혼잡은 상상을 초월하였고 이러한 도시의 혼돈을 경험하지 못하였던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자전거와 오토바이, 트럭과 버스 그리고 서민들의 생계 수단인 인력거 등은 앞 차와 승합차 사이를 서슴없이 끼어들어 마치 기교를 부리는 마술사처럼 보였고 교통지옥이 따로 없었다.

여기에 사람들이 가끔 승합차 앞을 가로지를 때는 등에 오싹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으며 버스와 트럭에서 내뿜는 매연은 목을 따끔따끔하게 하였고 눈이 따가워 앞을 가름 해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 마스크가 아니었다면 관광은 즐거움을 뒤로한 채 낙심천만하여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카트만두 시 외곽에 있는 원숭이 공원인 스와얌부나트에 도착하여 공원에 오르니 도심과는 전혀 다른 경관이 펼쳐져서 감탄이 절로 나왔고 매연과 오염된 공기는 삼림에서 뿜어 나오는 치톤 피드로 대체되어 상쾌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인력거에 앉아 잠을 자던 주인

사진기를 들자 벌떡 일어나

먼산만 바라보는 척 한다.

 

 

원숭이는 동물이 아닌 신으로 변신하여 여유 있고 늠름한 행보를 자랑하면서 연신 우리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화려한 털을 고르거나 사원 사이를 거닐며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탑 주변을 보호하고 있었다.

스와얌부나트 사원 내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주 탑은 카트만두 시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스와얌부나트 사원은 부처님이 강조한 자비와 사랑을 인간뿐 만아니라 동물들에게도 배분하여 자연 사랑을 실천하는 신들의 전당으로 생각되어졌고 행복한 삶의 원천은 창조주께서 주신 자연을 가꾸고 자연과 함께 할 때 주어진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네팔은 신들이 아끼고 사랑한 땅이면서 신들과 함께 거주한 곳이었고 신들이 인간들에게 기회를 제공한 행복한 국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와얌부나트 사원에서 내려다본 카트만두 시는 한 폭의 그림과 같았고 원시 자연림과 어우러진 사원 속의 나는 더없이 행복감을 느꼈으며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등 설산으로 들러 쌓인 사원은 절경이자 신비스럽기까지 하였다.

 

창문이 세개인데

중앙에 있는 창문에서 여신인 쿠마리가 등장하고

 

 

내가 네팔에 가기 전까지 네팔의 여신인 쿠마리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언젠가 T·V에 방영된 화상을 보고 너무 애처롭고 가냘픈 모습을 보았던 기억 때문이었다.

쿠마리 여신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고 한 어린 소녀를 선발하여 신격화함으로서 국왕은 물론 온 국민이 머리를 숙여 존경한다는 여신은 어린 소녀임에도 빼어난 미모와 재치를 갖춘 걸출한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네팔의 여신인 쿠마리가 거처하는 쿠마리 사원으로 간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긴장하여 그의 말이라면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는 욕심이 생겼다.

  

   양쪽 두 개의 창문에서는 남자 둘이 얼굴을 내밀고

우리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쿠마리 사원에 도착하여 보니 사원은 오래되고 거무튀튀한 목조 건물임을 쉽게 알 수 있었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서양인과 동양인 등 수많은 인파들이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쿠마리에 대한 인지도와 관심사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나는 쿠마리 여신을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하여 기뻐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으며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동화되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고 벅찬 감동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여신이 얼굴을 내밀고 등장할 것이라는 중앙 창문을 응시하면서 가족의 건강과 희망을 기도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기도 하였다.

관중들 모두가 초긴장 상태로 신비스러운 여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중앙 창문이 아닌 양쪽 창문에 남장을 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 남자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두 사람이 양쪽 창문에 얼굴 모습을 내밀고 관중을 향하여 주시하고 있었었다.

  

  

곧이어 주위가 웅성웅성 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앳되고 미모가 특출한 아름다운 여신이 나타났다.

갑자기 관중들은 환호하기 시작하였고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인 관중들은 감탄과 감격의 충격으로 멍하니 여신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신은 너무도 순수하고 청순하여서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여신보다는 훨씬 감동을 주었고 한 어린 소녀를 신격화하여 대중들 속으로 몰아넣은 인간들의 장난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여신의 눈은 크고 청순한 느낌을 주었으며 얼굴은 하얀 바탕에 길쭉한 전형적인 미인 형으로서 재치 있게 보였다.

  

   여신 쿠마리 사원

조용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마치 모델인양 포즈를 취하고 관중을 향하여 좌우로 얼굴을 돌릴 때는 요염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쿠마리는 보통 4~5세 때 선발되어 여신으로 추앙받으며 상처로 인하여 출혈이 되거나 생리 현상으로 인하여 출혈이 있을 시는 쿠마리 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고초가 있었다.

재위 기간 동안은 일체 신궁 밖으로 나와 대중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고 신성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발언은 용납이 되지 않았으며 신비스러운 신성을 고수하여야만 하였다.

쿠마리 여신은 국왕은 물론 모든 국민들에게 존경과 추앙의 대상이 되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만큼 화려함은 보이지 않았으며 우수에 찬 얼굴 모습은 나의 가슴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인상을 주기도 하였다.

  

한 때 왕의 거처였던 왕궁

  

실제 얼굴을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아서 구체적 상황 판단을 추측하기란 어려웠지만 양쪽 창가에 앉아 있었던 비서나 신궁 관리인 듯한 두 명이 여신의 신변을 수시로 점점하고 환기를 불러일으키며 감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여신의 행동반경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짧은 순간을 영원히 추억에 남길 수 있도록 사진 촬영을 허용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그것은 나의 짧은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베일 속에 감추어진 모습이 더 아름답고 신성이 오래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베일 속에 감추어진 신비스러움과 신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손길이 뻗어 있는 것은 네팔 국민들의 바람인 것 같았고 네팔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미래를 창출하기 위한 국가의 정책적 차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신성 속에 감추어진 네팔의 전통과 아름다음을 찾아볼 수 있어서 나에게 더없이 큰 영광이 되었다.

  

아름다운 페와호수

멀리 설산이 보일 듯 하지만 구름속에 숨어버리고

나올 기미가 도무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네팔의 전통과 정체성을 고수하여 가는 대표적적인 산실, 다르바르 광장의 왕궁과 쿠마리 사원을 뒤로 하고 포카라로 향하였다.

산과 호수의 아름다운 도시 포카라에 빙하가 녹아내린 호수가 있었다.

포카라로 이동하였을 때 날씨가 청명하여 더없이 보팅에 좋으리라 생각을 하고 페와 호수를 찾았다.

페와 호수는 상상하기 어려우리만큼 넓은 호수로 보였으며 네팔 중서부 지방에서 제일 큰 호수라고 하였다.

이 호수의 북쪽에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봉이 있다고 하여 백색의 설산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잔뜩 긴장하면서 보트를 타고 41조가 되어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청명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고 하늘을 먹구름으로 뒤덮으면서 으르렁대기 시작하였다.

페와 호수에서 노를 저어가며 백색의 아름다운 설산,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곳, 신들만이 잔치를 베푸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 등 정상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기회는 영영 사라지는 듯하였다.

실망은 안타까움으로 변하였고 비는 더욱 굵어지는 소리가 강해지면서 가슴을 졸여야 하였던 선상에서 돌아서려는 순간 하얀 설산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호수는 빗방울이 강해지고 구름이 시야를 가렸지만 북쪽 하늘아래 신비스러운 마차푸차레 봉인지 안푸르나 봉인지는 구분할 수는 없었으나 어는 산인가는 중요하지 않았고 설산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환상적인 신들의 전당인 산 정상은 햇볕으로 백색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고 한 폭의 산수화마냥 수시로 모양을 변화시키면서 우리들의 기쁨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신들의 기쁨에 보답이나 하는 듯이 나는 사진을 수십 번이나 찍어 가슴에 묻어 두었으며 이 기회를 놓치는 것은 평생 후회가 되지 않을까 하여 설산을 보고 또 보곤 하였다.

빗방울이 굵어져 어쩔 수 없이 돌아서기는 하였지만 아쉬움은 지울 길이 없었다.

 

출처 : 추억의 아름다운 이야기
글쓴이 : pongdor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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