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1997년 네팔-대중 다 깨운 스님

뜰안에 달빛 2017. 7. 8. 11:16

 

 

 

 

 

네팔 - 룸비니

 

(1997년 배낭여행)

5월 14일

 

17일의 룸비니

 

 한국 사찰 석가사에 드디어 도착

평상에 두 스님과 아가씨가 자전거에서 나리는 나를 쳐다본다.

합장을 하였다.

한 스님이 옷을 안 입었다며 죄송하라 한다.

그 스님은 네팔 트레킹차 오신 스님이란다.

 

인도 스리바시티에서 만난 인도참배객 차를 얻어 타고

인도 소나울리로 해서 당도 한 네팔 룸비니는

법당지반을 시공하고 있었고 요사체는 기억자로 끝방은 감수하는 네팔 건축가 방이고

그 옆방은 주지스님방 옅방은 아가씨가 묵고 있고 그리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통로 다음방은

귀빈이나 한국에서 오시면  큰 스님이 주무시는 vip 방

그리고 모서리가 식당겸 공양주방 그 옅에 방이 사무실과 객실...

첫 날 방사가 없어 아가씨하고 함께 사용해야 했다.

 

 

 

 

 

네팔석가사에서 첫날밤의 꿈 얘기

 

자정으로 접어든 시각 드디어 마중 나온 석가사의 자전거에 앉아

대중의 옹호속에 첫날 밤을 보내였다.

꿈에 가 보지 않은 법당이 2층에 있다 싶어 올라가보니

상하 두문이 있는데 하문에 들어갈려다 윗문을 열고 안을 보니

한국의 사당패 무리가 보였다

그 무리속에 한 여자가 나를 보더니

" 솔거다. 솔거가 왔다."

그 알고 하는 소리인가

그리고 내려와 절 입구에서 한 짚차가 있음을 보았다

짚차에서 내린 남자분에게 한마디 충고를 했다

절 입구에다 차를 받히지 안에 들어오면 되겠냐고 ...

이 차는 절에 공양를 하러 온 차이다.

 

꿈에 얘기를 듣던 주지스님이 말씀하시기를

 

" 중은 솔을 먹는것이 솔거다."

"저 공터에 주차장 하면 어떨가요?"

"아니 그곳이 주차장인줄 어떻게 아셨어요."

 

꿈에 있었던 얘기를 들려 주었더니 대답을 그렇게 하셨다.

 

 

주지스님의 나에 대한 소개

 

다리 염좌로 네팔에서 17일을 묵었다.

어느 날 네팔대사가 한 부부를 대동 내방하였다.

공양시간에 나에 대해 묻는 네팔대사에게

"  이 스님 대단한 스님이세요"

"??"

"이 스님 올 때 대중 다 일어났어요"

"???"

어처구니 없는 소개였지만 사실 그대로여서 할말이 없었다.

 

내가 올 때 방사가 다 차버린 상태에

주지스님 비롯 객스님은 혼자 여행하는 스님이 누군가 궁금하여 일어났고

날 데리러 보낸 18살 현지인 공양주와 같은 방에서 자는 공양주는 물론

자는 아가씨조차 일어날 수 밖엔 없었다..

그나마 몇 안되는 방사는 벌써 배낭객이 들어섰고

아가씨방에 힌 침대만 남었기에 아가씨도 덩달아 일어나야 했공.

하여 나보고 놀려대는 주지스님이 밉지는 않했다.

 

네팔 대성석가사 완성되기 전 요사체 일부 모습

 

"대단한 스님이다." 라고  놀려대는 한가지가 또 있다. 

네팔대사가 오기 전에 객스님이 가고 난 vip방을 사용했다.

특별한 스님이기에 특별히 대접한다며 내어 준 방이다.ㅋㅋ

(사실 그 방 밖에 빈 방이 없다.^^)

근데 얼마 안 있어 네팔대사와 부부한쌍이 오는 바람에

난 배낭객방으로 물러났다.

그러다보니 방마다 다 기거를 한 셈이  되였다.ㅋㅋㅎㅎㅎ

남들은 한 방만에서 자고 떠나는데

난 방마다 옮겨 자는 바람에 석가사에 있는 방을 다 잔 신세가 된 것에

 스님은 그렇게 놀렸다.

그래도 석가사에 있는 동안은 특별대접으로 vip방을 사용했다.

 

 

 

다리는 나을 기미도 없거니와 의료시설이 미미하여

치료가 더뎌갔다. 걱정이 되였다.

먼 이국땅에 와서 어쩌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있는 자신이

처량하여 에라!~ 염불이나 하자 ...마음을 달래볼 양

천수경을 시작으로 누워서 사시공양을 하면 어떠랴 하여

관음청 유치 청사~예참 그리고 반야심경, 내친 김에 유일하게 가져온

초발심자경문을 달달 외우고 있는데...

한칸 옅에 있는 주지스님방까지 내 목청이 흘러갔는지

방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갑자기  멈춘다.

'응?'

보니 문에서 주지스님이 스위치를 만지작~

'어? 전기절약!? '

오해할 판...

그런데 스님이 선풍기를 안 키고 있는 줄 알고

선풍기를 켜 줄려고 한 것이 off 해 버렸다며 미안하다고

"계속 염불해요 ."하신다.

난 마음도 저조한데 괜한 오해할 뻔 했잔으~~^^

 

 

 

 

 

 점심공양시간에 나에게 주지스님이 제안을 하나 놓으신다.

"아~스님 염불 참 잘하데요. 조그만 체격에서 어찌 그런 음성이 나오나요

이 절 다 지으면 법당 옅에 스님 방 하나 마련 해 줄터이니

나랑 여기서 같이 삽시다."

"ㅋㅋ 저보고 사람들이 초성이 좋다라고 하는데 마이크대고  하면 더 좋아요"

"그러면 1000만원 짜리 엠프 달어 줄터이니 여기서 삽시다."

"여기서 제가 뭘 합니까?"

"성지순례 오는 신도들에게 법당에서 불공만 하면 되요."

 

 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면 첫째 식수가 문제이고 둘째 여기서 머물으기엔 아직 젊다.

앞으로도 다른나라 배낭여행의 꿈이 남아있고 ...-

 

식수가 안 좋다라는 말에 스님도 쫌 걸리는 모양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물엔 석회가 많아서 물을 끊인 후

식혀 정수기에 걸러도 밑에 석회가 낀다고...

이 곳 사람들이 12~13살 나이에 여자는 일찍 시집을 가는 이유가

오래살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물 관계인것 같다라고 하신다.

 

 

 

 

어느 비구스님이 뜻이 있어 한철을 나고 방을 청소한다고

침대밑에까지 물을 쫘 악 끼얹고 청소를 했던 모양...

그런데 겨울내 같이 난 지도 모르고 또가리 한 뱀이 청소하는 바람에

기어나오는 것을 목격! 놀래여 다시는 안 온다며 갔단다.

 

룸비니의 깊은 밤엔 어른도 나가면 안된단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여우, 내지는 이리우는 소리가 들리거덩?

차칫 물고 갈지 모르니 나보고 아예 밤에 산책도 마란다.^^

(지금 생각인데 그 때 주지스님의 제안에 일단 수락할 걸 그랬나?

한국에서 살다 우채튼 가면 되잖아~_._)

 

룸비니엔  겁나는 살인 개구리가 있으니 특히 조심해야한단다.

"개구리가 뭐 무서워요"

"아닙니다  그 개구리는 한번 점프하면 몇미터 족히 나는데 잘못하여 사람에게 닿으면 5분도 안돼

손도 못쓰고 즉사합니다."

 

 

 

 

 

그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난 그렇게 할 일 없이 날을 구겼다.

사시공양시간에 종도 없이 목탁과 요령을 갖이고 하신다.

내가 하는 말

"사시공양 운집쇠송이라도 쳐야지 않아요.?"

"어떻게 종소리를 냅니까?"

"아 카트만두가면 징같은 것 있으면 구멍을 뚫어서 허공에 매달고 소리를 내면 되잖아요?"

(정말 카트만두에서 우연히 스님을 만났는데 정말 징을  구입하셨다.*^*^*)

 

 

 

 

 

천둥소리

 

이곳은 하늘이 아주 넓다.

하늘에 걸리는 공간이 없이 넓다보니 천둥과 벼락의 향연은 정말 스릴있고 멋있다.

한국의 번개는 끝이 짤려 짧다.

비가 쏟아 지는 저녘에 천둥과 벼락이 동반 볼 만하였다.

온 천지가 환하여 멀리 있는 나무들 까지도 볼 수가 있었다.

회랑에 놓여 있는 평상에서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번개를 감상하고 있었다.

주변에 전기불도 커지고 온통 흑빛에 하얀 번개불에 벼락소리만 호령하고 있었다.

9개째다. 주지스님은 방에서 나 하는 양을 보고

"스님  무섭지도 안나봐 ..방으로 들어오세요"

"잠깐만요 이왕 내 맘에 드는 천둥 번개를 보고 들어갈게요"

번개가 무서울게 없다

음과 양이 만나면 천둥 수반 벼락이 형성되는 이치를 알기때문에

나에게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무서울게 없잔으.

 

10번째 우루루 꽝꽝 번쩍!!~~번쩍

드디어 맘에 쏙~ 들어오는 번개와 벼락의 향연, 하이라이트

9개를 봤어도 무섭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은 정말 맘에 쏙 드는 하늘의 연주를 봐았다.

만일 이번에도 맘에 안든다면 난 겁이 났을 것이다.

겁이 날 정도의 하늘의 음양의 합성...와

빈 하늘에 꽉 찬 번개...정말 멋있었다.

주지스님이

"지독하다"

라는 소리와 함께 그때사  방에 들어왔다.

 

 

 

 

 

비자 얘기

 

 새벽에 도착 룸비니의 첫 날 대중을 깨우는 소동이 있었던 날 아침공양시

 " 네팔비자는 받었어요.?"

"안 받었는데요"

"그럼 어떻게 네팔에 왔어요"

"인도순례차을 탔던 관계로 일없이 국경을 넘어 왔어요"

"인도에서 출국도장받고 네팔비자 받어야해요"

 

대화를 듣은 네팔선생이 손수 가이드해준다고 하여 선생이니 어련히 알어서 하겠지 하고 따라 나섰다.

인도에서 내 비자를 보고 어떻게 비자를 안 받고 네팔비자는 받었는가 하며  네팔직원한테 간다.

네팔직원이 내 비자를 찍어줌서 인도비자도장을 받어야한다고 했었다.

네팔과 짜고 그렇는가 싶은기 네팔에선 아무일 없다고 고개만 흔들뿐...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이 몇명이나 되느냐"

"5~7명쯤 된다 왜그러느냐"

"차라도 한잔 사 줄가 하고 그런다."

차는 그렇고 루피를 달라고 하잖은가!! @.@ 루피를 !~

이 때 두번째 이질이 생겨 몸도 고달프고 하여 얼른 수습하고 싶어서

"얼마나 주면 되냐"

신문지에다 쓰라 한다.

200루피를 썼다. 그랬더니 5000루피를 신문지에 쓰며 요구하잖은가!

뭐? 기가막혀.

출국도장받는데 돈을 왜 지불해야하는가 

 날 우숩게보는구나 오천루피면 미화150달러이상인데(그때환율100$=3400rs.짜이 1루피)

출국도장을 받는데 돈을 요구하다니...

난 출국도장받지 않고 넘어온게 미안해서 차값으로 200루피면 충분하다 생각한 금액인데

글세 엄청난 금액을 요구하네 그 와중에 머리속에선 이이디어를 굴린다

 

 

 

 

네팔과 인도인들은 서로 이웃간 신분만 확인됨 그냥 왕래한다.

뭐 네팔차에 머리숙여 저 만치 지나갔다 내려 걸어와 출국도장받는 방법과

인도순레차을 얻어 타고 다시 인도로 가는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날은 덥지  몸은 고달프지 빨리 해결하고 싶어

주지스님에게 얼마나 주면 되겠나 물어볼 양으로 선생에게 석가사 전화번호를 물었다.

 공중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막 누르려하니 아까 루피를 요구한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문제있냐고 물었더니 따라오란다.

선생에게 문제있냐니 고개를 갸우퉁한다.

직원이 선생을 내리보면서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하며 내 여권에 출국도장을 찍는다.

옳지 됐다  그래 도장받었는데 200루피도 줄 필요가 없지...

바보 인도직원아 차라리 내가 준다고 할때 받었으면 좀 좋아

한푼도 받지 못하고 결국 도장을 찍었구나..ㅋ

선생에게 번호를 적고 공중박스로 향하는 내가 아마도 경찰에게 전화하는 줄 착각했던 모양이다.

인도의 경찰은 그래도 힘이 있다고나 할가

 

 

 

 

그날 저녁 룸비니에서 4.8 점등식을 하고 300rs 우리가족 아는 사람 스님등을 켰다.

그리고 석가사에서  꿈을 꾸었다.

 

(꿈에 붉은 옷을 입은 사당패 같은 사람속에 여자아이가 나를 가르키면서 솔거다.

솔거가 왔다 한다. 밖을 내다보니 짚차가 한대 오드니 공양할 물건을 내린다

"저기가 주차장인데 주차를 안하고 도량안 까지 들어오느냐.'하다 잠을 깨었다)

아침에 스님보고 "저기가 석가사 주차장으로 쓰면 좋겠다"

스님이 "아니 석가사주차장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왜 나보고 솔거라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이 상황를 주지스님께 얘기하며 내 혼자 했으면 더 빨리 해결을 볼뻔했다하니.

 "선생이 자기 아들을 한국에 보내 의사를 시킬려고 하는데 대꾸도 안하고 있다

한국에서 의사될려면 많은 비용이 드는데 선생이 무슨 돈으로 의사를 시킬려고 하는지 

오늘 아침에 과일인가 몇개 가져온 것도 내 인심을 살려고 한다." 하여 웃음만 흐날리였다.

 

 

 

 

 

보드가야 사랑방 운영하는 아가씨랑 식사하고 병원에 갔다

 나의 증세는 말할 것도 없이 뻔한 일이다면서 이질..

 버스가 안 다니는 코스를 90루피 네팔돈

3명 값 석가사앞까지 오는 버스, 버스안에 탄 사람들의 무던한 무 저항적 입장에 감탄할 뿐이다.

지붕위에도 타고 버스문에 발만 딛고 매달려 가는 모습에

우리나라 같으면 기사양반이 난리가 나는데....

 

                                                              대성석가사 법당 기초공사 사진

 

 (카나다에서 감리사 자격증을 딴 건축가의 고집으로 거의 1년이 되간다면서

    자주 일어나는 강한 지진때문에 지반이 흔들림이 없도록 감수한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였다.)

 

이렇게 또 할일 없이 며칠을 보냈다.

 네팔수도인 카트만두와 포카라등 여행을 마치고 남은 인도비자  기간에 다시

 인도로 들어가야는데

염좌된 다리로 근심이 된다.

지금 생각에 네팔에서 인도비자를 다시 받었으면 그리 조급한 마음이 일지 않았을터

그럼 6개월이라는 넉넉한 여유가 있을터인데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쩹

 

 

 

졸지에 엄마!가 되다 

 

날 현지에선 22~24세로 본다. 동안소리 많이 듣지만 완존 동안으로 들 속으니...

석가사 공양주가 날 보고" 몇살이냐"고 묻기에 46세라고 정확히 말해도

거짓말이라고 믿질을 않는다.

"really" 라고 해도 비식~ 우스며 아니란다.

지 엄니가 45센데 그에 비하면 난 누나뻘  된단다. 

주지스님이 45세다. 지엄니하고 동갑이라고 아버지 하고 부르거덩

근데 불사하신다고 애쓰셔 엄청 늙은 한국에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친근한 아저씨처럼

나이들어 보인다.

"주지스님에게 물어봐..."주지스님이 "맞다 "라고 해도 안 믿는다.

할 수 없이 여권을 보여줬다.

눈이 휘등그레하며 "mother!~" 하고 부른다.

"그려~난 어머니뻘이다. 지금부터 넌 son이야.~ ^^"

그래서 팔자에 없는 18살 아들이 생겼다.

"한국말로 son이 아들이야. 내가 아들~ 하면 네~ 해라.^^"

공양주 부를 일 있음 아들!~ 하면 대답을 안 하고 꼭 son!~ 해야

영어로 yes 한다 . 그래도 아들이란 단어를 인식할 때까지 아들~ 아들...^^

 

 

 

 

5월 18알

 

네팔 카빌라바스투와 구루손 구나함 불 탄생지 방문

구마루가 운전한 싸이클을 카고 베트남 일본 중국절에 갔다 왔다.

아직들 공사중이다.

 

 

5월 22일 

잘 걷지도 못하니까 아들 공양주가 주지스님에게 제안을 낸다

주지스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공양주 젊은 신랑은 신바람이 났다.

 

무슨일이냐면

본가로 가면 막 시집온 16세의 예쁜 신부를 보러가는 것이다.

본인의 집에는 아직 큰일을 치루기 전인 신부가 있다.

네팔에서는 부모끼리 허락함 결혼하는 풍습이 있는데

꼭 우리 어르신네 결혼하는 것과 흡사하다.

 

합방인가 하는 것을 1년간 치루지 않은 상태로 지낸단다.

왜 결혼하면서 1년을 합방하지 않은 체로 지내는가...하면

어린신부라니 신랑이 하는 행동에 낯설지 않겠금 1년간

친정을 오가면서 부모에게 성교육?을 받는 시기가 1년을 예비를 두는 시기란다. 

 그런데

본가의 이웃에는 염좌된 발을 교정해 주는 할아버지가 있다면서

나의 발목을 교정하면 어떻겠냐고 주지스님에게 제안을 한 것이다.

주지스님말씀 "지 각시보고파서 저런다고..."

그 바람에 뒷자전거에 몸을 실고 얼마쯤 20~30분 쯤 그 이상을 갔었다.

얼마를 가니 동네가 나타났다.

그 동네에 교정하시는 할아버지께 염좌된 발을 보여 드렸다.

시기가 좀 지났다고 하면서

옆으로 머리를 돌리라고 하신다.

막 머리를 돌리는데 악!~~~~

눈물이 난다.

기름을 발에 바를 때 꺼정 영문을 모르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긋난 발을 비틀어 맟춘 것이다.

그 아픔이야말로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3일 꼼짝도 하지 말라..."

동네에 사람들은 다 보고 있는데 그만 소리를 내였다.

 

 

 

그리고 본가로 갔다.

집안에 마루대신에 황토터방이 곧 마루였다.

뭣 모르고 신발을 싣고 들어갔다 무안해서

얼른 신발을 벗었다.

황토마루 끝에는 소가 메여 있었고

그렇게 보고픈 각시가 부엌 쪽에서 부끄럼을 타며 걸어 나온다.

그렇게 신부얼굴을 본 후 자전거는 쾌적하게 석가사를 향하여 굴렀다.

 

 

 

 

 

어느 날 붓타께서 처음으로 고향의 정반왕을 방문하실 때 이모인 마하파자파제가

도중에 나와 영접하고 가사를 공양했다는 곳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별모양 사탕을 (한 봉지10rs) 샀다.

 

네팔에선 참 시간에 설탕내지는 사탕종류인 단 것을 준다.

왜냐면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단 것을 먹는 것이 건강상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탕이 비싼 음식의 하나이다.

귀사하면서 아들~하고 부르니 부끄러운 듯 공양주가 얼굴을 내민다.

선물 !!~

 별사탕봉지를 받아 든, 이제 막 장가든 새 신랑 표정이 예뻤다.

 

 

 

 5월 24일

코크라에 간다는 것이 무효가 됐다

비가 왔다.

2틀 후에나 가라고 하신다.

 

 5월 26일

만타라와 부처님 대탑에 갔다

불멸 후 8등분한 사리탑 중 아직 개채돼지 않은 부처님사라탑이다.

 허술하기 짝이 없다

되돌아 올때엔

버스지붕위에 앉아서 왔다. 이런 모습이 오랫동안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맥없이 출입구만 보고.. 

 

딱히 할 일도 없고 문쪽을 맥없이 쳐다보는데  키가 훤칠한 젊은 남자가

석가사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키도 클뿐만 아니라 얼굴은 양반네 얼굴처럼 준수하게 잘 ~생겼다.

게다가 젊은이잖아~^^

 

반가히 맞으며 젊은이에게 먼저 말을 건넨 건 나다.

여러 날 있어도 배낭객들은  없던 차라 한편 반가웠다.

내가 네팔에 있을 때는 비수기였고 방학이 아니기 때문에

인도고 네팔~스리랑카 5개월 여행중에 한국 사람을 보기 쉽지 않했다.

어쩌다 일본인을 만나면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같은 동양인이기도 하고 언어가 좀 통했기에 그랬나 보다.

 

저 젊은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젊은이는 네팔에 들어온 지 한달 비자가 끝나 가는데

너무 좋고 물건을 사고 싶은데 돈이 떨어져 한국에다 전화를 하려고 석가사에 왔단다.

대구가 집인데 전화 상 부모로부터 협상?이 안된 것 같다.

(5분 전화에 네팔  500루피)

네팔비자가 끝나는 관계로 할 수 없이 네팔 수도인 카트만두로  떠나야 했다.

 마침내 24세의 젊은이의 동행으로 용기를 내어

룸비니에 온지 15일 만에 드디어 카트만두로 向 하였다.

 

*

*

 

 

 

 뜰에 핀 장미

 

 

염좌때문에 17일간의 룸비니에 있었던 일이다.

발염좌는 3일간 꼼짝말라던 그 일은 실행이 지켜지지 않아 도로아미타불이 된 상태.

한국에서 x레일 찍었는데 뼈조각이 튕겨나와 수술불가란다.ㅠ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만의 여행얘기로서 기록하는 위주로 한 글입니다.

행복한 나날을 엮으시길 빌어마지합니다.

 

 

 

 

 

 

 

 

 

 

 

 

좋은 여행 하시고 많은 공부도 하셨겠습니다



뜰안의 달빛님



다녀가심에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 되시길 기원드립니다